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현대 과학의 아버지로서 그에게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따라다니곤 합니다. 피사 사탑의 실험,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한 일, 그리고 종교재판 후 조용히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읊조른 일화 등이 그것이지요. 특히 갈릴레오의 명함과 같은 그 말,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마치 종교에 맞선 과학을 대변하는 자유사상가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갈릴레오가 갖고 있던 일화들은 사람들의 생각해오던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터닝 포인트를 만든 한 사람에 대해서 심도 있는 과학과 철학, 신학에 조예가 깊은 두 전문가가 만나 파헤쳤습니다. 이탈리아 파도바대학교의 과학사 분야에서 '갈릴레오 석좌교수'로 있는 윌리엄 쉬어[각주:1]와 에스파냐 팜플로나의 나바라대학교에서 과학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마리아노 아르티가스가 그 두 사람입니다. 




이 책은 갈릴레오의 여섯 번의 로마 여행을 중심으로 그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두 저자는 이러한 갈릴레오의 일생을 정확한 사료에 입각하여 재구성하기 위해 로마와 피렌체의 문서고들을 뒤졌습니다. 저자들은 갈릴레오가 여행 기간 동안 만난 교황, 교회 성직자들과 귀족, 자연 철학 등 저명한 인사들과 나눈 편지들로 그 시대에 갈릴레오아 맞닥뜨렸던 역사적 생생함을 더했습니다. 또한 갈릴레오가 주로 머물렀던 피렌체의 사진, 갈릴레오의 친구이자 후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협력해주지 않았던 우르바노 8세의 초상 등 사진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책 속에서 여섯 번의 로마 여행은 갈릴레오가 어떻게 종교재판에서 유죄를 받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추적했고, 그가 누린 찬란한 영광과 그림자에 대해서 긍정과 부정적 시각을 걷어내며 담담한 시각으로 갈릴레오를 그렸습니다. '논란 많은 한 천재과학자를 위한 변명'이라는 부제를 그가 가장 오래 머문 로마와 피렌체에서 주고 받은 서신들과 자료들을 통해 나름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출처 : 픽사베이, 피렌체 풍경 사진





갈릴레오의 진실 줄거리 요약

1.  첫번째 방문, 안정적인 연구를 시작하다.

갈릴레오가 첫 번째로 로마를 방문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였습니다. 갈릴레오는 다양한 분양을 공부했지요. 파사대학교 수학을 청강했고, 약학을 공부했으며, 그 전에는 예술학부 학생이기도 했습니다. 대단하죠? 갈릴레오는 여러 분야를 공부했으나 자신이 진정으로 관심있는 분야는 수학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네.. 더 대단한 분입니다. 그리고 수학을 연구할 수 있는 교수가 되고자 했고,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학부의 졸업보다는 추천서가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추천서를 받기 위해 당시에 권위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 자신이 작성한 논문을 보여주고 다음 해 그는 본인이 연구하고 싶은 분야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십년 동안은 파도바 대학의 교수로 일하고 그 이후에는 자신의 고향에서 유명한 사람 밑에 들어가 자리 잡고 안정적으로 연구했습니다.


그의 나이 첫번째 여행의 시기에 교황 식스토 5세가 그의 나이 64세에 즉위했고 5년간 어떤 교황보다도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며 새 로마를 만들었습니다. 교황의 의욕적인 활동은 갈릴레오에게도 사뭇 충격적이었으며 나아가 로마라는 곳의 중요성을 느끼며 교회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후 다섯 번 더 여행할 때에도 마음에 되새겼습니다. 


2.  두번째 방문, 어느덧 명망있는 교수가 되다. 

그의 두 번째 여행은 1611년에 있었습니다. 1587년 첫 여행을 떠났을 때는 수학을 전공한 후 일자리를 찾아나선 스물셋의 청년이었지만 다시 로마를 찾았을 때 갈릴레오는 명망있는 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망원경을 이용해 달 표면의 굴곡들과 목성의 위성을 발견했는데, 망원경을 통한 발견을 알렸으나 초반에 페루자대학교 교수들이 항의를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이에 맞서고 결국 학계의 인정을 얻어냈지요. 갈릴레오는 린체이 아카데미를 포함 지식인들로부터 망원경과 여러 발견의 성과를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추기경 바르베리니가 갈릴레오의 숭배자까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의 발견은 예수회의 승인까지 얻었으나 4년 뒤 그가 로마에 세 번째 방문을 하고자 했을 때 로마 주재 대사 구이차르디니는 구세력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긴장을 감지하고 그의 방문에 우려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3.  세번째 방문, 지동설에 대한 침묵을 맹세하다.

로마에 돌아온 그는 4년 후 세 번째 로마 방문을 결심합니다. 세 번째 방문은 '카스탤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논문때문이었죠. 이 글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갖고 성경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단지 그는 과학자로서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밝힌 것인데 오히려 일이 커지면서 일을 해결 하기 위해 1615년,1616년 2년에 걸쳐 로마에 갑니다. 그러나 그의 희망과는 다르게 결과는 매우 불리했습니다. 그는 추기경에게 지동설에 대해서는 절대 찬성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살아남기 위해 그의 제안을 수락합니다. 이때 작성된 문서는 나중에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는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카스탤리에게 보내는 편지'는 갈릴레오가 처음으로 신학에 개입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는 그의 발견을 기초로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지지했으나 그 당시에 그의 발견을 지지해줄 증거가 부족했고 결국 이것이 그의 발목을 잡습니다. 


4.  네번째 방문, 포기할 수 없는 신념 책으로 만들리라.

1624년 예순의 나이에 갈릴레오는 네 번째로 로마를 방문합니다. 그는 학회의 회원들에게 본인의 연구물들을 보여주고, 바이에른 공자에게는 졸레른 추기경에게 이 기구로 별을 관측한 보고서를 보내기도 합니다. 예순이란 나이에 그의 방문은 본인과 친분이 있던 교황을 만나 지동설을 지지하는 글을 쓰는 게 가능할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죠. 갈릴레오는 그리스도교가 계시된 진리를 바탕으로 한다고 굳게 믿었으며, 이 진리들은 신앙과 윤리에만 관련되고 천문학적 가설과는 아무 상관없다고 여겼지만 1616년 이래 이 신념을 숨기고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교황을 만나 6차례나 환대를 받으며 그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감지하고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를 집필하기로 결심합니다. 


5.  다섯번째 방문, '대화'를 출간하다. 

1630년 그는 다시 로마를 방문하게 됩니다. '대화(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두 세계관에 관한 대화'라는 본인의 신념을 은근하게 녹여낸 책을 출간하고 싶어서였죠. 그 시대를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기본 입장에 따르면 천계는 불변이며, 변화와 소멸은 오직 지상에서만 일어난다고 보았거든요. '대화'에서는 여러 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구성으로 글을 전개해 나갑니다. '대화'의 첫 날 갈릴레오는 달에도 산이 존재하는 것을 이야기하며 천체라고 해서 지상의 물체와 전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견해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대화'의 둘 째날은 지구 자전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그리고 셋째날에는 지구가 수성, 금성, 화성, 토성과 함께 태양 주위를 도는 공전에 대해 이야기하죠. 그리고 '대화'의 마지막 날이자 넷째날에는 태양중심설이 행성들의 운동을 간단히 설명하는 것의 이유를 바다의 밀물과 썰물에서 그 물리적 증거를 찾습니다. 그는 집필 후에 본인의 뛰어난 집필 능려과 본인 지지세력 덕에 검열을 무사히 통과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몇달 후 후원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마침내 1632년 피렌체에서 '대화'를 출간합니다.


6.  여섯번째 방문, 종교재판 앞에서 서다.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대화'는 출간된 후 그는 엄청난 구설수에 오릅니다. 그의 여섯 번째 로마 여행은 로마 당국의 분노에 맞서기 위해 그의 나이 69세인 1633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때가 바로 그 유명한 종교재판이 열리던 해입니다. 우리가 매우 잘 아고 있는 갈릴레오의 명대사 '그래도 지구는 돈다(Eppur si muove)'. 정말 갈릴레이는 이렇게 말했을까요?


갈릴레이는 첫 번째 여행에서 얻은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승인을 얻는 일의 중요성, 승인을 못 얻어도 결코 교회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갈릴레이가 교황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참회하는 것으로 재판은 마무리가 됩니다. 


즉 그는 '지구는 돈다'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의 첫 여행 이후로 교회에 인정받는 것의 중요성을 인지한 후로 단 한 번도 교회의 심기를 건드리려고 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그는 지동설을 지지했지만 그가 가르친 학생들에게는 지동설을 가르친 적이 없을 정도로 교회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던 그였지만.. 열의를 갖고 집필한 '대화'라는 책 때문에 그에게 가택연금조치가 내려졌죠. 1642년 갈릴레오가 타계하기 전까지 가택연금조치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가 죽고 난 다음에도 변변한 묘지조차 마련되지 못했습니다. 


출처 : 픽사베이, 피사의 사탑





1992년, 갈릴레오 360년만에 명예를 회복하다. 

1992년 10월 31일 로마 교황청은 갈릴레오를 완전히 복권시켰습니다.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카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한지 1633년 6월로부터 360년이 지나서였습니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지난 10월 31일 갈릴레오의 고통스런 오해와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가톨릭 교회와 과학 간의 비극적인 상호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를 파문한 신문관들도 당시 알려져 있던 일반적 지식에 따라 행동한 것이라고 옹호하면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확신한 신학자들의 잘못한 물질세계 구조에 대한 이해를 성서식 해석에만 의존한 데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현대 과학이 태동하던 갈릴레오가 생존시기에 우리가 알던 '과학자'라는 뜻의 scientist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현대의 과학자라는 단어 scientist는 영국의 철학자 휴얼에 의해 1833년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갈릴레오가 살던 시기만 해도 과학자는 현대적 의미의 과학자가 아닌 자연 철학자, natural philosopher였습니다. philosopher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 갈릴레오의 신분은 가설을 세우고 자연에 대한 탐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철학적으로 풀어내는 사람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그 시대의 철학이란 가톨릭 중심의 세계관이었고, 갈릴레오가 살았던 시대의 성직자들은 갈릴레오의 발견을, 발견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모든 지식적 발견은 가톨릭 중심의 철학을 대변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1992년 당시 교황 요한바오로 2세 '가톨릭 교회와 과학 간의 비극적 상호 이해부족'이라는 말을 통해서도 그 당시적 한계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현대 과학의 아버지

그가 살았던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보여진 그의 과학적 업적은 무척이나 의미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먼저 천문학과 물리학에 있어서, 갈릴레오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천장에 매달린 등불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견한 '진자의 등시성',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한 적이 없다고 알려진 '낙하 법칙', 망원경을 통해 '지동설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목성과 그 위성들의 공전'을 관측, 관성의 법칙, 비중천칭과 온도계의 발명 등이 그것입니다. 또한 그가 어려서부터 관심 있던 수학분야에서 그는 '무한집합'의 본질적 특징을 처음 발견, 확률론에도 기여하였습니다. 


이상 기술한 갈릴레오의 업적을 볼 때 그는 비록 종교재판에서 유죄를 받고 힘든 노년을 보냈으나 그가 이룬 업적은 '현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가 주고 받은 서신들과 극의 처신은 우리가 평소 생각해오던 과학을 대변하는 자유사상가로서의 이미지와는 매우 거리가 멉니다. 그는 그의 신념을 마지막으로 알리고 싶어 '대화'를 집필했으나 그 말미에는 교황과 가톨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신에 대한 경배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은 점, 평생 교회의 인정을 받으려 한점, 본인의 신념과 다르지만 학생들에게 지동설을 가르치지 않은 점, 마지막 종교재판에 세워졌을 때는 교황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본인의 잘못을 시인한 점 때문이죠. 하지만 그런 모습 또한 살았던 시대와 그가 가톨릭 신자였음을 고려했을 때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마무리 

갈릴레오의 진실은 갈릴레오의 생애와 가톨릭이 지배했던 그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책이며 현대에도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했던 것처럼 그 시대 신학자들이 물질세계에 대한 이해를 성서식 해석에 의존했다는 말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유효해 보입니다. 현대 과학의 아버지에 대해서 교황이 복권시켰던 1992년 과학은 과학으로서, 종교는 종교로서 고유의 영역으로 발돋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2017년 지금도 어떤 포털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과학과 종교라는 두 영역은 마치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컨버전스, 몇 해 전부터 산업계에서, 학문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말입니다. 컨버전스라는 단어는 여러 기술이나 성능이 하나로 융합되거나 합쳐지는 일을 뜻하죠. 물질 문명이 발전하면서 그 발전의 형태는 그 분야에서 진일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다른 분야로 이식되고 이전되면서 함께 발전하는 것까지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과학 또한 다른 분야들과 계속 컨버전스되면서 발전을 이루고 있지요. 그러나 여전히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은 어깨를 나란히 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1992년 갈릴레오라는 천재 과학자가 진정한 현대 과학의 아버지로 종교계에 인정받았던 것처럼 현대 과학은 과학으로서 물질 세계를 탐구하는 하나의 학문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컨버전스 융합이라는 말은 '반드시'라는 어떤 필연적인 의미를 더하고 있지는 않듯 융합되지 않고 서로의 체계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은 그냥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주면서 함께 공존해가는 것이 현대적 의미에 맞는 과학과 종교의 컨버전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1. '국자과학사 및 과학철학협회'와 '국제과학사학술원'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유럽과학재단의 인문분야 상임위원장 역임했다. 저자, 공저자, 편집자로서 '갈릴레오의 지적 혁명'을 비롯한 25권 여의 책을 집필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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